좋은글 게시판

드레퓌스 사건

장부장. 2013. 8. 7. 16:48
반응형




드레퓌스 사건 



드레퓌스 사건은  1894년  프랑스는 당시  보불전쟁으로 

인하여  매우  어려운 상황에  빠져 있었으며


보불전쟁이  끝남과 동시에  프랑스의  여론은 끓어 올랐다

누군가에게  책임을  전가하기  위해서 였는데 


이로인해  프랑스는  급격하게  국수주의적  보수주의적

제국주의적인  성격을 띄게 되었다. 



1894년  독일 우편함에서  한장의  편지가  발견되었는데

이것은  프랑스  기밀문서로써  알프레드 드레퓌스


육군소령이  스파이로  지목되었다. 결국  드레퓌스는

검거후  기아나의  악마섬으로  유배를  당하게  되었다



2년이  흐른뒤  피카르 중령이  재조사하여  드레퓌스가 

진범일 근거가  없다고하였으며  에스테라지의  문체가



발견된  기밀문서와  같은것이  나타나게 된다  이때 

드레퓌스는  씻지못할  역사의  죄인이 되어있었기에 



재심사를 하느냐  마느냐를  놓고  국론은  엄청난  

분열을  하게 된다 


결국  진범으로  추덩되던  에스테라지는 영웅시되어 

무죄판결을  받고  피카르 중령은  누설죄로  감옥으로 가게된다 



이후  에밀 졸라가  행동에 나서게 되는데  나는 고발한다 라는

공개편지를  대통령에게 보냈으며  드래퓌스에 대한 재심으로 


요구하였지만  국수주의적  분위기에  졸라역시  엄청난 

수난을  당하였으며  결국  런던으로  망명하게  된다 



100년이  흘러서야  드레퓌스 사건은  자그 시라크 대통령이 

공식적으로  무죄라는  사실을  인정하였다.


결국  음모론으로 결론이  났는데  드레퓌스는 100년이 지나서야

죄를  벗을 수 있었다. 



드레퓌스 사건은  철저한  인권유린 탄압의  사건으로  인용되며

국가가  결정한  사항이  한 개인의 일생을  어떻게  바꾸는지 

정확히  보여주고 있다. 




반응형